인쇄역사 > 동양의 인쇄역사

(1) 중국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목판 인쇄를 시작하고 활자 또한 발명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목판 인쇄술의 원류인 인장이나 석경은 한이나 위나라 때 이미 있었고, 이러한 것들이 목판의 조판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인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세계 최고의 간기본으로 공인받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있다.

당나라 때 인쇄된 이 책의 말미에는 “함통 9년(868) 4월 15일 왕개가 양친을 위해 삼가 만들어 보시함”이라는 간기가 있고, 길이 4.8미터, 폭 30센티미터의 두루마리로서 첫머리에는 석가가 지원정사에서 설법하는 그림까지 그려져 있고 본문의 인쇄가 매우 깨끗하다. 그런 우수한 인쇄술로 미루어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목판 인쇄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하고 있다.

중국에서 목판 인쇄가 크게 성행한 것은 당나라 후기의 풍도에 의해서였다.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있어 인쇄술의 발명자로 여겨지고 있는 풍도는 재상으로 있으면서 새롭게 발명된 목판 인쇄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크게 개량시켜 수많은 유교경전을 인쇄해 냈다. 당시에 간행된 서적들 가운데 현존하는 것을 대부분 돈황에서 출토된 것으로 947년에 간행된 《관세음보살상》과 950년에 간행된 《금강반야바라밀경》등 10여 종이 있다.

송대의 인쇄사에 있어 특기할 만한 일은 활자의 발명인데, 필승이 1040년대에 찰흙을 재료로 하여 6면체를 만들고 여기에 볼록하게 문자를 새긴 후 구워서 단단하게 만든 활자로 인쇄를 하였다. 그라나 이 활자는 적합한 잉크가 없어 인쇄가 신통치 않고 한자의 수가 너무 많아서 수많은 활자를 모두 만들기보다는 종래의 목판 인쇄를 하는 편이 쉽기 때문에 널리 활용되지 못하였다.

원은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서양 문물의 교류에 커다란 공헌을 했는데 인쇄문화 발전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특히,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쿠빌라이 황제에서 우대를 받으며 17년 동안 살다가 귀국하여 저술한 《동방견문록》속에 중국이 목판으로 인쇄한 지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때의 관판은 모두 홍문서가 주관하여 개판했는데, 이들 판본 중 1292년에 간행된 《자치동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후 궁중에 예문감을 두어 경서의 인쇄를 전담시켰고, 각 지방 관아에서도 서적 간행이 활발하였는데, 특히 복건지방 책방에서의 서적 간행이 성행하였다. 한편, 1314년에는 왕정이 목활자 6만여 개를 만들어 자신이 집필한 《농서》22권을 간행하고 부록에 목활자 조각법, 조판들 만들기, 활자의 배치법, 문선, 식자, 인쇄법 등 목활자를 이용한 조판, 인쇄의 공정 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명대에 들어와서는 대장경과 같은 큰 개편사업이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개판은 주로 강소, 절강, 복건 지방에서 이루어졌는데, 강소의 서적은 품질이 좋으나 값이 비쌌고, 복건은 종류도 많고 값이 쌌으나 영리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품질이 나빴다고 전해진다. 명대의 인쇄에서 한 가지 특기할 것은 후금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안색인이라 부르는 4색 인쇄가 이뤄지고, 동활자를 만들어 서책을 인출했다는 점이다.

동활자는 도활자에 비해 자획이 선명하고 내구성이 강했는데,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금속활자본은 명의 홍치 7년(1494)에 간행된 《금수만화곡》이다.

명의 뒤를 이은 청나라 때는 《강희자전》등 방대한 개판 외에 수백 종에 달하는 도서가 간행되었다. 또한, 건륭제의 칙명으로 10년 이상을 걸려 3,459종 36,275권으로 편찬한 《사고전서》는 역대의 고전, 역사, 사상 및 기술, 문학을 짐대성한 것으로 중국 인쇄사상 빼놓을 수 없는 저작물이다.

청대에는 인쇄방식도 목판인쇄뿐만 아니라 동활자와 목활자, 도활자를 사용한 활자인쇄가 병행되었는데, 특히 강회년간에는 《고금도서짐성》1,628권을 통활자로 인쇄했다. 이때의 동활자는 북경의 무영전에 보관되어 오다가 주화가 고가인 것을 빙자하여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동활자를 녹여 주화를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더 이상의 동활자 발전은 좌절되고 건륭 29년(1744)에는 목활자 25만 자를 만들어 여러 가지 책을 간행해 냈다.

그후 1807년 영국인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에 의해 소개된 서양식 납활자에 의한 인쇄본이 나왔고, 1876에는 사상 최초의 석판 인쇄본까지 출현 하여 근대식 인쇄시대를 맞게 되었다.

모리슨은 1823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원을 받아 《중국어 사전》을 3부 6권의 대작으로 완성했는데, 이때 한문활자는 중국의 조각공이 직접주석에 조각하여 마카오에서 인쇄를 했다.

이 해에는 또한 말레카의 영화학당인쇄소에서 중국어로 번역된 《신천성서》21권을 발간했는데, 동양에서 한자가 서양식 활판인쇄에 사용된 것은 이것이 최초이다.

1844년에는 미국 개신교 장로회의 해외전도국이 마카오에 활판인쇄소를 개설하여 운영했는데, 이 인쇄소의 5대감독으로 취임한 윌리엄 갬블(William Gamble)은 전주법으로 1호부터 7호까지의 한문활자 모형을 완성하고, 사용 활자의 수를 5,150자로 정하여 문선과 식자의 공정 기초를 확립하였다. 1861년에는 인쇄소를 상해로 옮겨 '미취선관'이라 개명하였는데, 일본은 명치유신을 전후하여 이곳에서 개화에 필요한 어학서적을 인쇄해 갔으며, 갬블은 훗날 일본에 서양식 활판인쇄술을 전파시키기도 하였다.

(2) 일본

일본의 인쇄술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생겨난 제지술이나 목판인쇄술 모두 우리나라를 거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의 인쇄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백만탑다라니경》이다. 이 인쇄물은 일본 여왕이었던 칭덕천황이 전란을 평정했을 때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살생의 소멸을 염원하는 뜻에서 764년에서 770년까지 6년 동안에 걸쳐 1백만 개의 작은 목조탑을 만들고 그 안에 다라니경을 봉안하여 각 사찰에 반사한 경전이다.

이는 일본의 정사와 사찰의 기록이 일치하고 인쇄물도 현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인쇄물로 알려졌었으나, 간기가 없는 탓에 국제적인 공인은 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 인쇄물 이후 3백여 년 가까이 소수의 귀족들 사이에서 필요한 경전 들은 모두 필사본으로 충당할 수 있었던 탓에 인출된 서적이 없었다. 그후 1080년에 이르러 《묘법연화경》2권이 날염법으로 간행되었고, 1088년 목판에 조각하여 인쇄한 《성유식론》10권과 1091년 《대공작명왕경》등이 간행되었다. 그후 13세기 중엽부터는 고야산을 중심으로한 각 사찰에서 개판사업을 펼쳤는데, 이를 고야판이라고 한다. 이들 고야판은 용지와 장정 등에서 독창적인 취향을 보였고 인쇄물은 직접 판매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16세기 중엽에는 교토의 오산을 중심으로 한 사찰에서 오산판이 간행되었으며, 불전 외에도 문학서 등 다른 서책들의 인출을 보게 되었다. 이는 모두 승려 들에 의해 목판으로 인쇄된 것으로, 이들 인쇄물의 특징은 종전까지의 두루마리나 접어서 하던 제본을 봉철 방식으로 개선한 점과 간행사업에 송나라에서 귀하한 승려들이 대거 참여한 점이다.

일본의 인쇄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의 교서관 등에서 약탈해 간 무수한 금속활자와 수많은 인쇄도구, 서책 및 활자본 등에 의해서이다. 이 활자로 1593년 일본 최초의 활자본인 《고문효경》을 간행하고, 1597년과 1599년에 《금주단》과 《일본서기 신대권》을 각각 간행했다. 그라나 이들은 모두 기록으로만 전할 뿐 현재 전해 오는 것은 없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약탈해 간 동활자의 본을 떠서 동활자를 만든 다음 천황에 게 헌상했는데, 1621년에는 이 활자로《황조유원》을 간행했다.

1606년 수뢰가 목활자판으로 간행한 《제감도설》은 후쿠미판에 자극을 받아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원본을 번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삽화가 풍부한 책으로 유명하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간 활자로 인쇄를 시작한 이후 약 50년간의 활자본을 고활자판이라 부른다. 일본 최대의 고인쇄물로는 천해판이라 불리는 대장경이 손꼽힌다. 이는 자안대사 천해가 1637년부터 1648년까지 11년간에 걸쳐 동경의 관영사에서 개판한 것으로 1,453부 6,323권으로 된 일본 최초의 대장경이다.

이 장경본의 전반은 목활자로 인쇄하고 후반은 목판인쇄로 하였는데, 현재도 당시의 목활자 일부가 전해 오고 있다. 한편, 1590년에는 서양식 활판 인쇄술이 전해되었는데, 이는 중국보다 1년 뒤진 것이다. 일본에 최초의 활판 인쇄술을 전래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신부였던 알렉산드로 발리그나니였다. 그는 일본을 네 번이나 왕래하면서 일본 예수회를 설립하는 등 선교활동에 힘썼으며, 활판 인쇄기와 활자 도입은 물론 인쇄 기술자까지 데리고와 신학교 안에 인쇄소를 설치했다. 이 인쇄소는 아마쿠사, 나가사키, 교토 등으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목활자와 주조활자에다 일본어와 라틴어, 포르투갈어를 전용 또는 혼용하여 《금구집》, 《평가물어》등 종교 및 일반서적 30여 종을 발간했는데, 표지는 조각판화(예칭)로 인쇄하고 본문은 먹색에다 적색을 섞어 두 가지 색으로 인쇄한 것도 있다.

기독교 박해 이래 중단된 서양식 인쇄술은 그후 2백여 년 동안 회복되지 못하고 일본은 기존의 재래식 방법에 의한 인쇄를 계속했다. 에도 말기인 1848년에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인쇄기와 활자 및 인테르 등 활판인쇄에 필요한 기자재를 보내 왔으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1857년에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인쇄기와 활자 및 인테르 등 활판인쇄에 필요한 기자재를 보내 왔으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1857년부터는 양학 학습이 시작되면서 사용할 교과서로서 서양 원서를 활판으로 인쇄할 것을 기획하자 이치가와 사이쿠는 네덜란드에서 보내온 스타오프형 수동 활판인쇄기와 서양활자를 이용하여 1858년에 《서양무공미담》등을 인쇄했다. 1861년에는 다이우라거류지에서 영미계의 인쇄기와 활자로써 일본 최초의 신문인 《재팬 헤럴드》가 발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본격적으로 신식 활판인쇄를 시작한 것은 1870년 일본 활판인쇄술의 원조로 불리는 가 납활자의 주조에 성공한 이후부터이다. 일본은 1853년 문호개방으로 서양의 책들이 필요해짐에 따라 네덜란드에서 인쇄기와 활자를 주문하려 인쇄를 계속했는데, 중국의 활판인쇄술 전래에도 기여했던 윌리엄 갬블이 중국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다가 1869년 이곳에서 기술지도를 해 주었다. 활판 전습소에서 인쇄술을 익힌 사람들은 신문을 창간해 운영하다가, 1871년에는 동경으로 진출하여 공부성 산하에 활자국을 개서하여 동경 유일의 활자 공급처 구실을 하였으며, 각 지역에 활판인쇄술을 보급시키는 데도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1868년 학교 제정의 공포와 함께 문부성 내에 편집국과 번역국 등을 설치하여 국민학교 교과서 외에 서양의 계몽서와 전문 학술서 등을 왕성하게 간행하였다. 이때의 가장 대표적인 인쇄물로는 《백과사전》을 들 있는데, 이 책은 일본 백과사전의 효시가 되고 있다. 명치유신 후에는 활판과를 설치했다가 1872년에는 인서국을 창설하고 외국인 인쇄기술자를 초빙하여 신식 활판술과 제본기술을 배웠다. 그후 인서국은 1875년 9월에 대장성의 지폐료에 병합되어 인쇄업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출처:대한인쇄조합연합회 4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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