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역사 > 서양의 인쇄역사

(1) 독일

독일은 서양의 인쇄문화 발상지인데, 이는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가 그의 출생지인 마인쯔에서 1444년에서 1448년 사이에 납활자를 만들어서 활판인쇄를 시작한데서 비롯됐다.

구텐베르크는 원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금은 세공사였으나 정치적 이유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1440년 경부터 인쇄업에 종사하다가 마인쯔로 돌아왔다.

당시의 책들은 필사생들이 양피지에 한 자씩 써 나간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고, 값도 매우 비싸서 서민들은 구입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구텐베르크는 값비싼 책을 보다 싸고 대량으로 간행할 목적으로 납활자로 인쇄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유럽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각국의 금속 세공사들이 금속활자를 만들어 쓰고 있었고, 제본업자들 또한 책등에 금박을 찍기 위해 날개 활자를 만들어 쓰고는 있었다. 그러나 강도가 너무 강하여 대량인쇄에는 부적합한 철활자였는데, 구텐베르크는 납과 주석, 안티몬 등을 섞어 경제적이면서도 인쇄하기에 적합한 납활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구텐베르그가 납활자를 만들어 최초로 인쇄한 책이 《세계 심판의 단편》이지만 활자가 일정치 못한 시험 단계의 것에 불과하며, 자신이 만족한 첫 작품은 《42행 성서》이다. 이 책은 1450~1455년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본문은 20포인트 고딕체를 사용하여 2단 42행으로 체제를 갖추어 검정색으로 인쇄한 다음 머리문자는 붉은색과 푸른색을 사용해 손으로 채색을 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는 경영상의 문제로 인해 인쇄물과 함께 인쇄기, 활자, 그 밖의 인쇄시설 일체를 부채 대신에 요하네스 푸스트(Johannes Fust)에게 압수 당하고 말았다. 푸스트는 이 공장의 기술자였던 피터 쉐퍼(Peter Schoeffer)와 함께 1457년 《성시서》를 간행하였다. 쉐퍼는 파리에서 공부한 후 구텐베르크 인쇄소에서 일했는데, 그는 서사나 채식, 세밀화 기술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쇄에 필요한 소양도 갖추고 있어 식자, 인쇄, 활자 주조 등을 담당하면서 인쇄물을 집접 제작해 세계 인쇄사에 이름을 남겼다.

푸스트에게 공장을 빼앗긴 구텐베르크는 새로운 출자자를 구해 마인쯔의 건너편인 엘트빌에다 두 번째 인쇄소를 차린 후 운영하였다. 그러나 1462년 마인쯔의 교구 쟁탈전으로 인해 이들 모두의 인쇄소가 불타서 인쇄시설이 훼손되고 기술자들이 흩어지면서 당시까지 비밀로 취급되던 활판인쇄술이 유럽각지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기술자들은 주된 교통로인 수로를 따라 라인강 연안의 반베르크, 스트라스부르크, 퀄른 등지의 도시에 인쇄술을 전하고, 뒤이어 아우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등의 도시에도 인쇄술이 전파되어 근대 문명의 기초를 기초를 닦게 되었다.

마인쯔 다음으로 활판인쇄술이 시작된 반베르크에서 인쇄소를 차린 사람은 구텐베르크의 조수였던 알브레히트 피스터(Albrecht Pfister)였다. 그는 구텐베르크의 《36행 성서》에 사용했던 활자들을 물려받아 1461년 구약성서 중 네 사람의 전기를 다룬 《4사서》를 간행했다.

피스터는 최초로 책 속에 목판으로 삽화를 넣고,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책을 인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반베르크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판인쇄술이 시작된 도시는 스트라스부르크로, 전파자는 역시 구텐베르크의 조수였던 요한 멘텔린(Johann Mentelin)이었다. 그는 마인쯔에서 피터 쉐퍼 등과 함께 구텐베르크의 휘하에서 활자 주조와 글자 장식 일을 거들다가 스트라스부르크로 돌아와 인쇄소를 개설했다. 그는 1466년 최초로 독일어로 된 성서를 인쇄하고, 고딕 활자 대신 로만체 활자를 사용했다.

멘텔린이 죽자 사위인 아돌프 루슈(Adolf Rusch)가 사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인쇄업자는 물론 출판업자이자 서적 판매업자, 지업상으로서도 크게 성공하였는데, 독일은 물론 스위스의 바젤 등에까지 용지를 공급하였다.

쾰른에 인쇄술을 전파한 사람은 마인쯔에서 푸스트와 쉐퍼 인쇄소의 기술자로 있던 올리크 젤(Ulrich Zell)로, 그는 1462년에 내전을 피해 퀄른으로 와서 인쇄소를 차린 이후 40여 년 동안에 걸쳐 200여 종의 서적을 간행했다. 그 후 퀄른에는 많은 인쇄기술자들이 생겨나 수십년 동안 서부 독일의 인쇄중심지가 되었는데, 영국 최초의 인쇄기술자인 윌리엄 캑스톤(William Caxton)도 1471년 경 이곳에서 인쇄술 배웠다.

이들 도시 외에도 독일에서 인쇄가 번성했던 도시는 아우구스부르크였는데, 스트라스부르크의 멘텔린의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운 권터 자이너(Guner Zziner)가 14668년 이곳에서 인쇄소를 개업했다. 그는 1472년에 삽화를 넣은 최초의 독일어판 그림책인 《황금전설》을 간행하고, 1475년에는 그림을 넣은 성서를 최초로 인쇄했다. 또한, 세빌리아의 대사교 이시도루스의《에티몰리지》, 캠피스의《그리스도를 본받아》등도 간행했는데, 이 중 《에티몰리지》는 중세 때 간행된 백과사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도시의 또 다른 인쇄인이었던 에르하르트 라트롤트(Erhard Ratdolt)는 도서의 겉표지와 장서표를 최초로 만들어 넣었고, 화공이 일일이 그려서 넣었던 머릿글자와 테두리를 처음으로 목판 인쇄로 처리했으며, 활자 주조가로서도 비범한 재능을 보여 1468년에는 《활자 조견표》까지 만들었다.

뉘른베르크도 초기에 인쇄술이 발달한 도시이다. 구텐베르크로부터 인쇄술을 배운 하인리히 케퍼(Heinrich Keffer)가 1470년 인쇄소를 개업했다. 또 다른 인쇄 출판업자였던 안톤 코베르거(Anton Koberger)는 판화가들의 협력을 얻어 삽화가 대거 수록된 인본을 간행하기도 했다. 당시 뉘른베르크는 유럽 각지에서 상인들이 모여드는 중앙 유럽 최대의 상업도시였는데, 이러한 활기 띤 경기를 타서 인쇄업체 및 출판업체들이 크게 번창하면서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의 인쇄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뉘른베르크는 세계 인쇄사에 잇어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1524년 뉘른베르크 시의회는 종교개혁을 주창한 루터주의를 억압하기 위해 인쇄를 하려는 모든 서적은 미리 교구에 제출하여 검열을 받아야 하며, 여기에서 불가 판정을 받을 경우 인쇄를 못하도록 규정한 교황의 척령을 채택했는데, 이것이 훗날 인쇄물의 검열제도로 변천하여 언론탄압의 원천이 되었다.

이 외에도 한자(Hansa) 동맹의 중심지로서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던 뤼벡은 동부 유럽은 물론 발트해 연안의 여러 도시와 국가들에게 인쇄술을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라이프치히는 인쇄업이 크게 번창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독일은 물론 전 유럽에서도 인쇄 및 출판업의 중심도시로 알려졌었다.

이처럼 독일은 인쇄술이 생겨나 크게 번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인쇄술을 보급시키는 역할까지 했다. 15세기 중에 유럽에서 간행된 총 4만여 종의 서적 가운데 3분의 1이 독일에서 인쇄되었고, 그 중에서도 3분의 2가 스트라스부르크, 퀄른, 아우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라이프치히의 다섯 도시에서 인쇄되었는데, 당시에 사용된 활자의 종류만도 1천여 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2) 이탈리아

유럽에서 독일 다음으로 인쇄술이 싹튼 나라는 이탈리아였는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찬란했던 문화가 새로 생겨난 인쇄술의 힘을 빌어 르네상스를 맞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학문과 종교, 미술, 음악 등 모든 분야에서 유럽의 중심지가 된 이탈리아는 인쇄라는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하면서 전국으로 전파시켰다. 이는 15세기 경 이탈리아의 인쇄소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타 나라들보다도 휠씬 많았고, 인쇄물 또한 가장 많았던것에서 입증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특히 미술인쇄가 발달했다.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하고 있는 로만체나 그리스 및 이탈리아 문자를 비롯하여 유럽에서는 최초로 동양문자를 활자로 만들어 인쇄를 했고, 악보인쇄와 금박장정 등도 창안해 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인쇄소가 생겨난 곳은 로마에서 조금 떨어진 수비아코였는데, 이곳에서 인쇄소를 개업한 사람은 구텐베르크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운 콘라드 스바인하임(Conrad Sweynheim)과 아놀드 판나르츠(Amlod Pannartz)라는 두 독일인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베테딕트과 수도원의 후안 투레크레마타(Juan Turrecremata)의 후원을 얻어 1465년 《도나투스(Donatus)》와 아우쿠스티누스의 《신국, De Civitate Dei》등 4종류의 책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467년에는 로마로 가서 또 다시 인쇄소를 개업하여 키케로, 아우구스티누스 등 주로 고전서의 간행에 힘써 1472년까지 약 40종을 펴냈다.

동서 교통의 중심지이자 이탈리아의 문화, 산업, 예술의 중심도시였던 베네치아에는 1469년에 인쇄술이 전파되자 짧은 기간에 260개의 인쇄소가 생겨났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 전체의 인쇄소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것이었다. 이곳의 인쇄소에서 간해이된 도서는 양적으로도 매우 많았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책과 그리스어 활자본까지 만들 정도로 질적으로도 뛰어났다.

베네치아에서 인쇄소를 처음 개업한 사람은 독일인 스피라(Johannes de Spira) 형제였는데, 이들은 1469년 시세로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등을 인쇄하여 호평을 받았다. 또한, 프랑스인이었던 니콜라스 젠슨(Nicolas Jenson)은 프랑스 왕의 명으로 마인츠에 파견되어 구텐베르크 인쇄소에서 약 3년 동안 수업하고 1470년 베네치아에서 인쇄소를 설립했는데, 그는 독일풍의 고딕체 활자에서 둥근 모양의 로마체 활자를 창시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의 활자는 읽기 쉽고 인쇄했을 때 활자의 먹이 골고루 묻어 그 전까지의 인쇄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우수성을 보여 훗날 모든 로마체 활자의 모체가 되었다.

이 밖에 베네치아에서 이름을 남긴 인쇄인으로는 대학에서 전공했던 그리스 문학을 새로운 기술이었던 인쇄에 접목시켜 부흥시킨 마누티우스(Aldus Manutius)와 복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 초판본을 인쇄해 낸 발다퍼(Christopher Valdarfer)가 있었다. 특히 마누티우스는 오늘날 이텔릭체라고 하는 사체 문자를 시인이었던 베트라카의 필적을 본떠 만들었으며, 여러 나라의 국어를 병기한 다국어 간행본을 펴낸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피렌체 또한 이탈리아의 인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이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로서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활동하면서 이탈리아 정신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활판 인쇄가 전해지기 전에 이미 금속조각 기법의 인쇄가 행해지고 있었다. 즉, 피니게라(Tommaso Finiguerra)가 당시 유행하던 니엘로(Niero) 세공에서 착상을 얻어 급속판의 에칭법을 발명하였는데, 이러한 동판술이 발전하여 오목판 인쇄법의 근간이 되었다.

피렌체에 처음 인쇄술을 소개한 사람은 바나드 세니니(Bernard Sennini)로 그는 인쇄에 관한 책을 보면서 독학을 하여 인쇄방법을 창의적을 연구하고 활자의 주조를 시험에서 인쇄기는 물론 잉크까지 스스로 제조했다. 이 도시의 또 다른 인쇄인 나콜라 디 로렌쏘(Nicola di Lorenzo)는 1477년 베티니(Bettini) 사제의 《디오의 성산》을 동판 그림이 들어간 책으로 인쇄했는데, 이 책에 삽입된 풍자적인 삽화는 훗날 영국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의 집필에 큰 암시를 주었다. 또 한, 로렌쏘는 단테의 《신곡》을 최초로 인쇄했는데, 이탈리아어로 인쇄한 것이어서 많은 인기를 얻어 여러 차례에 걸쳐 중판하였다.

알두스 마누티우스(Aldus Manutius)가 이탈리아 인쇄술 발전에 기여한 공도 크다. 그는 인쇄효과를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는 점 외에도 그리스 활자와 이텔랙 활자를 완성하여 20여 년 동안 그리스 고전 등 120종 이상을 간행했다. 그가 간행한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1499년에 발간한 《포리필러스의 꿈속 사랑의 투쟁》과 1501년에 간행한 《저작집》등이 있다.

(3) 프랑스

프랑스에는 1469년 독일인 올리히 게링(Ulrich), 마틴 크라츠(Martin Crantz)등이 소르본 대학 구내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책을 간행함으로써 활판인쇄술이 전해졌다. 또한 같은 해에 기욤 피세(Guillaume Jichet)와 장 엔랑(Jean Heynlin)이 처음으로 파리의 대학 안에 인쇄소를 개업했으며, 1473년에는 기욤 르 로이(Guillaume le Roy)가 리용에 인쇄소를 설립하였다.

당시의 파리에는 6천여명 의 서사인과 채식가가 있었다. 이들은 인쇄술을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것으로 단정하여 인쇄술이 보급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면서 갖가지 방해공작까지 펼쳤으나 인쇄술이라는 획기적인 신기술을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프랑스 초기의 대표적인 인쇄인으로는 이탈리아에서 로만체 활자로 명성을 떨친 니콜라스 젠슨(Nicolas Jenson)외에도 도레(Estiennes Dolet)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그의 시집인 《화원》을 비롯해 수학과 신학서적 등 500종 이상의 책들을 간행했다. 특히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각장을 여러 질로 세분하여 그후에 출간된 모든 성서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라틴어 사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판을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판매가 금지된 서적을 판매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는데, 그의 묘비에는 “인쇄기술을 가장 진지하게 논한 최초의 인쇄인”이라는 글이 새겨졌다.

환판 인쇄술은 독일에서 생겨나 이탈리아에서 성장하고 프랑스에서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을 만큼 16세기 초엽 60여 년 동안 파리의 인쇄계는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당시의 유명한 인쇄업자로는 조프로이 토리(Geoffroy Tory)가 있는데, 그는 뛰어난 인쇄 기술자요, 도안가이자 장정가, 활자 디자이너였을 뿐만 아니라 저술가, 시인, 예술가로도 명성을 떨쳤고, 나아가 교수이자 비평가, 개혁가로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르네상스기의 새로운 문물을 습득하고 귀국하여 대학의 교단에서 활동하면서 아르바이트로 그리스어 및 라틴어의 교정을 보다가 인쇄에 흥미를 느껴 또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활판과 목판, 제본기술을 배웠다.

귀국에서는 파리에 서점을 차리고 목판조각을 겸하면서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여 당시까지 사용되던 고딕활자를 추방하였으며, 1529년 활자서체 고안에서 불후의 명작본으로 손꼽히는 《화원》을 집필해 간행하기도 했다.

이 밖에 노들담에서 태어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베네치아의 인쇄인 알두스 마누티우스에게서 인쇄술을 배우고 바젤의 저명한 인쇄인 프로벤의 식객으로도 지낸 바가 있다. 그의 최초의 라틴어 번역이 수록된 그리스어《신양성서》는 프로벤이 인쇄를 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이 성서를 대본으로 독일어 성서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격언집》, 《대화집》등의 명작과 함께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우신예찬》을 펴낸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4) 그 밖의 유럽 국가들

영국은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인쇄술이 독일인에 의해 전파된 것과는 달리 자국인에 의해 도입되었다. 영국에 최초로 인쇄술을 전파시킨 사람은 윌리엄 켁스톤(William Caxton)으로, 그는 원래 런던의 섬유회사 네덜란드 주재원이었으나 1472년 독일의 퀄른에 가서 활판 인쇄술을 습득하여 네덜란드의 브뤼즈에서 《트로이 역사》를 번역해 간행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영어로 된 활판 인쇄본인데, 문장의 첫머리 대문자는 아름다운 색채의 문장부호로 장식했다.

1476년 영국으로 귀국한 그는 웨스터민스터 사원 안에 영국 최초의 활판 인쇄소를 차려《철인어록》등 100여 종의 책을 간행했는데, 이때 그가 사용한 활자가 캑스톤 블랙이라 불린 고딕체이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활자체를 창안하고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윌리엄 캐즐런(William Caslon)과 활자는 물론 잉크와 종이까지 제조하여 유명해진 존 배스커빌(John Baskerville)이 나타났다. 캐즐런은 활자의 주조사업을 시작하여 런던의 모든 활자업자를 능가하는 성공을 거둬 왕실인쇄소의 활자까지 납품하게 되었다.

또한, 1734년에는 활자 조견표를 발행하여 영국의 활자를 통일시켰는데, 그가 만든 활자체는 캐슬런 올드 페이스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배스커빌은 원래 손재주가 명성에 자극을 받고 1752년 버밍햄에 활자 주자소를 개설하여 독특한 모양의 배스커빌 서체의 활자를 만들었다. 이 서체의 활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활자 제조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오늘날까지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 밖에 시인이자 염색가로서의 명성을 떨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도 미술인쇄에 심혈을 기울이고 고대 활자를 부활시킨 활자를 주조하는 등 인쇄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네덜란드의 활판 인쇄술은 독일보다 앞선다는 학설이 다수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발달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하알렘에서 로렌스 안스죤 코스터(Lourens Janszoon Coster)가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활판인쇄술을 발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1638년 하버드 대학 학장의 후원을 받아 매사추세츠의 케임브리지에 인쇄소를 개업하고 이듬해 《자유인의 선서》를 미국 최초로 인쇄했다. 그러므로 미국의 인쇄 역사는 멕시코보다도 1백여 년이나 뒤진다.

미국 초기의 인쇄인 중 덱스터(Gregory Dexter)는 인쇄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인데, 그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기에 국회의 권리를 옹호한 정치가 존 핌(John Pym)의 연설짐과 신대륙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인쇄해 냈다.

또한, 인쇄인으로서 국가와 사회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쇄인으로서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도 초기 인쇄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인쇄업계에 입문했던 그는 영국 런던에 가서 본격적으로 인쇄 기술을 배우고 귀국하여 1729년부터는 인쇄업체를 직접 운영하면서 <펜실베니아 가제트>를 인수하여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는 훗날 신문의 논설 등을 집필한 언론인이자, 번개와 전기의 상관관계를 밝힌 실험을 성공시키고 지진과 수리분야의 과학기사를 집필한 과학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정치에도 참여하여 토마스 제퍼슨 등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미 합중국 헌법의 초안 작성에도 참가했으며, 프랑스 대사로 부임하여 동맹조약을 체결시키고 영국과의 강화조약 체결시에는 미국 대표로 참가하여 조약에 서명하기도 했다.

토마스(Isaiah Thomas)도 인쇄인이자 교육자로서 명성을 떨쳤는데, 그는 인쇄업에 종사하면서 인쇄역하의 연구와 인쇄인의 교육에도 힘써 미국 인쇄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가 집필한 《미국 인쇄사》는 오늘날에도 귀중한 책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아동도서 출판에도 앞장서 미국 아동도서 출판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밖에 미국의 인쇄를 발전시킨 사람으로 기억할 만한 사람들은 많이 있다. 맥컬러(Thomas Mackeller)는 세계 최초의 인쇄분야 전문잡지인 《타이포그래픽 애드버타이즈》를 창간하고 《미국 인쇄인(American Printer)》이라는 인쇄기술 입문서를 간행하여 호평을 받았다. 전미국인쇄공업협회(PIA)의 전신인 타이포디티 클럽(The Typothetae Club)이라는 인쇄인들의 단체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한 데비네(Theodore L. Devinne)는 선구적인 노력으로 인쇄기술 향상에도 기여했으며, 인쇄역사를 다룬 《인쇄술의 발명》과 인쇄기술을 다룬 《활판인쇄의 실제》를 저술하여 인쇄분야 학문체계 수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활자의 자모 조각기를 만들어 전세계로 보급시킨 벤톤(Linn Boyd Benton)과 라이노타이프를 개발한 머겐달러(Ottmar Mergenther), 활자 자동식자기인 모노타이프를 개발한 랜스턴(Tolbert Lanston), 그리고 예술적인 활판인쇄에 심혈을 기울여 90여 종의 새로운 서체를 개발한 윌리엄 가우디(Frederic William Goudy)등도 미국은 물론 전세계의 인쇄발전에도 커다란 공헌을 한 인물들이다.

<출처:대한인쇄조합연합회 4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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