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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애초에 말로써 자기의 생각을 나타냈고 다음에는 그 생각을 남기기 위해 암서, 수골(獸骨), 목피 등에 그림을 그렸으며 다시 그 그림에서 문자라는 것을 만들게 됐다. 그리고 그 문자를 사용하여 사상과 사실을 영구히 보존하고 또한 널리 알리려고 인쇄술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미국의 서지학자 맥머트리(McMurtrie, D.C.)는 그의 저서에서 ‘인류의 문화사에 있어서 인쇄술의 발명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인간의 모든 분야에 걸친 일과 경험은 인쇄라는 매개를 통해 널리, 높게 , 멀리, 깊이 퍼져서 무지와 사교 억압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인쇄매체인 신문, 잡지, 서적이 인간의 사상과 행동에 끼친 위력은 세계 각 국의 위정자들이 국민의 언론을 조정한다는 명목으로 신문과 출판에 여러 가지 제한을 가하고 또 그것을 억압한 것만 가지고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곧 인쇄 역사는 인류 역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불가결의 중대한 요소인 것이다. 어느 나라이든 정치, 경제, 종교, 교육, 사회, 사상, 철학, 문학,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인쇄술을 빌리지 않고는 충분한 활동과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는 인쇄가 세계의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인쇄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쇄에 있어 우리나라의 인쇄사는 청주 홍덕사지에서 발굴된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임이 증명되었고 또한 우리나라 유엔 가입 기념으로 ‘월인천강지곡’을 인쇄한 금속활자판틀과 영인본 및 인쇄된 판틀을 확대한 장식품이 UN본부에 기증됐는데 이 ‘월인천강지곡’은 독일 쿠텐베르그의 금속활자 인쇄기 발명 보다 앞섰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이며 또한 국제적으로 알려진 찬란한 인쇄사를 가진 자랑스러운 나라이다. 이에 또한 지방 인쇄문화가 역사로서는 진주에 서양식 근대 활판인쇄술이 도입된 것이 80여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 타지방에 앞섰던 것은 문화도시 진주의 자랑이요 인쇄인의 긍지를 심어주는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수집한 기존의 문헌과 자료를 바탕으로 한정된 지면관계상 개략적으로 인쇄문화를 살피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Ⅱ. 인쇄문화의 사적 고찰

1. 일제시대

두류문화권인 진주지역은 예로부터 많은 학자들이 학문활동을 해왔는데 특히 조선시대에 있어 남명 조식선생과 그 후학들에 의해 본판으로 만든 많은 조식선생과 그 후학들에 의해 본판으로 만든 많은 문집들을 남겨 놓은 기록들이 있다.

각 서원, 서당에서 교과서를 출판보급하여 후자들에게 학문을 연마하는데 막대한 역할을 한 것은 후일 다시 밝히겠으나 서양식 근대 활판인쇄술의 도입은 경남일보 창간으로부터 그 기록이 있기에 진주지역의 인쇄사를 기술코자 한다. 지방신문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창간된 경남일보가 1909년 8월 19일에 정부의 신문발행 허가가 있자 경남일보사 관여자들은 신문 발행에 필수품인 인쇄시설 확보에 관심을 돌렸다.

이들은 서울 교동에 위치한 우문관 건물과 인쇄시설은 이보다 먼저 서울에서 신문 창간을 준비하던 대동일보사에서 매입하기로 계약한 바 있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매매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인쇄시설 확보에 주도적 역할을 맡아왔던 홍천군수 등 관직을 지낸 김영진과 김홍조, 김기태 등 경남의 유지들은 인쇄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던 차에 경남관찰사 황철 지원 가세를 받아 1909년 9월 중순에 우문관 활판소 인쇄시설을 계약하게 됐고 이에 따라 신문발간 사업은 더욱 구체화됐던 것이다. 곧이어 우문관 인쇄시설은 진주군 성내1동 경남일보사에 설치됐다. 창간 당시부터 주필을 맡아왔던 위암 장지연이 초빙으로 교분이 있었던 김영진이 인쇄시설을 매입하기 위해 상경했을 때 당년 9월 초순에 이뤄졌다 한다.

1911년 1월 8일자로 경남일보 인쇄인이 된 이기홍은 창간 당시 인쇄인이었던 이후기의 후임이며 이는 우문관 인쇄시설을 매입할 때 인쇄기술자로 발탁돼 이기홍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의 기술자를 대동해온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 이유로는 1909년 11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 보도에 ‘경남일보는 비록 지방신문이나 그 발행부수가 8천여부나 된다’고 했다. 또한 인쇄시설 규모도 상당했다는 사실을 다음의 자체 광고문으로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1910년 3월 16일자 ― 본사에서 각 관청급 면리장이 공용하는 각종 인쇄물과 각 명함 등속을 정밀, 선량히 인쇄하는 바 가격도 타 인쇄소 보다 염헐(廉歇)하오니 내외국 검(檢)군자는 하도(何道) 하군(何郡)을 물론하고 우편으로 식양만 통보하시면 의거 인송할 터이니 조량하심을 경요’이는 신문외에 외간 인쇄물도 취급한다는 것과 타 인쇄소 보다 우수한 제품을 염가로 납품해 주겠다는 광고내용인데 그 내용중 타 인쇄소라는 말은 진주에 일본인이 인쇄소와 문방구, 지류 취급을 겸한 한국인 인쇄소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인쇄 20년사중 한국인쇄사편에 ‘김홍조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주식회사 인쇄소를 설립한 사람이다.

그는 1909년 10월 15일 경상남도 진주군 성내1동에 주식회사 경남일보를 발간시켰다’라고 했다. 1989년 11월 25일 복간된 신경남일보가 외간물 취급을 위해 1990년 8월 25일 진주시 당국에인쇄소 등록을 필한 것과 같이 인쇄업계에 일본인이 8할 이상 점유하고 있던 1910년대에 그에 경합하는 외간물 취급을 위해 인쇄소 등록이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 인쇄소 설립 허가업체가 된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경남일보가 1915년 1월 창간됐고 이로부터 20년후인 1935년 9월 1일 ‘영남춘추’가 창간됐다. 영남춘추는 신문 스타일의 타블로이드판 16면 월간이었는데 발행 겸 편집인 신현수, 인쇄인은 진양당 인쇄소 강주수로 되어 있다. 창간호를 인쇄한 진양당인쇄소 시설의 규모면이 상당했다고 엿볼 수 있으나 일본인 인쇄소의 시설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같다. 제9호부터는 인쇄인이 불천무삼랑(北川戊三郞)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부터 그림인쇄가 나오기 시작했고 활자모양도 미려해진 것으로 보아 일본인 인쇄사의 시설이 우수했다는 것이입증된다. 1936년 8월 15일 제12호 인쇄인이 북천무삼랑으로 되어 있고 9월 15일 제13호 창간 1주년 기념지에는 인쇄인이 진주 개문사로 되어 있다.

이 창간 1주년 기념지에서 부터 석판인쇄를 한 것이 보이는데 선명한 인물사진 등이 인쇄된 것을 볼 때 진주지방 인쇄술의 큰 발전의 계기라 보여진다. 개문사에서는 활판부와 석판부를 설치하여 포스터 등을 제작한다는 광고도 게재되어 있다. 이러한 개문사의 석판인쇄 도입은 진주지방 평판인쇄의 시초였다. 진주 저명회사 소개란에 인쇄 문구 진주 개문사, 진양당인쇄소, 잡화인쇄산현문구점, 경일인쇄, 합동인쇄소 등 5개 인쇄업체가 소개돼 있다. 1936년 1월 1일 창간된 중앙 공중보는 발행인 정필화, 인쇄인 강주수로 되어 있어 영남춘추 창간호를 인쇄한 진양당인쇄소가 다시 중앙공중보의 창간호 인쇄를 맡았던 것이다.중앙공중보는 1937년 2월 1일 제14호로 끝나고 ‘남선공론(南鮮公論)’이라 제호를 개칭하여 당년 3월 1일 제15호로 지령이 이어지면서 계속 진양당인쇄소에서 인쇄됐던 것이 1938년 1월 1일 제22호부터 인쇄인이 북천무삼랑으로 바뀌었다.

1941년 12월 26일 제64호에는 인쇄인이 진주 합동 인쇄주식회사로 되어 있고 활자의 모양이 진주개문사(북천무삼랑)의 것보다 미려해진 것을 볼 때 시설이 보완된 것이 보이는데 그때 당시 일제 말엽에 군소업체 통합 지시에 의해 합동으로 하면서 법인체로 만들었으며 통합지시의 이유는 한국인 인쇄업체 강압과 고철 등 물자부족 때문이라 한다. 1940년대 초까지 일본인이 경영하던 진주 개문사를 김천수가 인수, 경영해 오면서 진해해군본부의 인쇄를 맡게 됐는데 본부에는 물론 함흥, 청진 등 배편 또는 화물차편으로 대량 인쇄물을 제작, 납품해 왔다. 종업원의 수도 1백여명에 이르렀고 시설도 상당 수준의 석판시설, 활판시설 등과 많은 활자 보유업체로 지방인쇄로는 단연 제일의 규모였다 한다.

2. 해방후~60년대

이러한 인쇄시설 규모를 갖추고 있던 개문사는 해방후 경남일보 중창간(1946.3.1)에 큰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하자면 개문사의 인쇄시설로 인해 경남일보 중창간이 용이했다는 것이다. 당시 중창간 발기인에 허만채, 문해술 그리고 개문사의 김천수 등 삼인으로 돼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이 충분하다. 김천수의 아우 김만흥의 고증에 의하면 개문사를 경영하던 김천수가 그의 아우 김삼만에게 공작기계를 구입, 철공소를 설립해준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농기계구조 대메이커인 대동공업주식회사라 한다. 이 대동공업사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윤전인쇄기를 만들어 경남일보에 설치해 신문인쇄를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사용했다 한다.

1950년대초까지만 해도 신문사를 제외한 인쇄소시설들이 거의 족답식활판기 등으로 인쇄물이 제작되고 있을 무렵 진주인쇄소 하동규에 의해 프린트가 시작됐고 이어 공판인쇄가 도입돼 각종 출판물이 이에 의해 많이 간행됐다. 50년대 중반에 문방구, 노트제작을 겸하여 인쇄업을 하던 학우사 박영상은 활판전지기를 도입해 대단위 노트 제작공장을 운영했으며 한편 동양인쇄소 김영규는 활자 주조기를 설치, 활자생산을 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경상남도 인쇄공업협동조합이 진주에 위치하게 돼 진주의 인쇄업계가 활기차게 움직였다. 경상남도 인쇄공업협동조합은 1964년 1월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분리 독립됐는데 이때 초대 이사장에 주식인쇄소 김윤식이 1964년 1월 26일 취임했고 2대 영남인쇄소 하금영, 3대에 중앙인쇄소 김길수, 4대에는 초대 김윤식이 다시 맡아오는 동안 진주 활판인쇄의 중흥기를 이뤘다. 그러다가 1971년 5월 27일 김이곤이 5대 이시장을 맡으면서 경상남도 인쇄공업협동조합은 마산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70년대 이후

1970년대 초에 콜로타이프인쇄가 사진업자에 의해 설치돼 앨범인쇄를 전문으로 해왔으나 대도시 즉, 부산, 대구 등의 오프셋인쇄에 밀려 문을 닫게 됐다. 70년대 중반에 진주에도 오프셋인쇄기가 몇몇 업자에 의해 설치됐으나 사진제판이나 사진식자 등의 시살전무로 어려움이 따랐으며 기계는 모두 수동이었다. 한편, 이때 청타조판기와 마스터인쇄가 등장하게 됐다. 1970년대 말에는 두류문화권의 인쇄문화가 일대 혁신적 개혁기를 맡게 됐다. 금호인쇄에서 1979년 11월 독일 하이델베르그 자동 오프셋인쇄기, 사진제판시설, 사진식자기 등의 설치가동과 선진기술 도입으로 인쇄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컬러인쇄가 시작되면서 낙후됐던 진주지방 인쇄문화에 급진적 발전의 계기를 이뤘던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동인쇄사를 비롯해 자동오프셋인쇄기가 차츰 도입, 설치되기 시작했고 80년대 말에는 컴퓨터 조판기가 등장해 요철조판인쇄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진주시 인쇄소 등록대장에 의하면 신규 인쇄등록법(1961. 12. 30 제정) 시설 이전의 업체현황은 기록보존이 미비, 대다수의 미등록으로 파악할 수 없었으나 등록번호 제1호 주식인쇄소 김윤식으로부터 1991년 11월 현재 제 119호에 이르고 있는 중 현재 72개 업체, 폐업 등록업체 10개 업체, 결번 37개였다. 현재 72개 등록업체중 40여개 업체가 1986년 이후로 등록돼 있어 최근 업체 스스로의 등록과 당국의 독려로 거의 등록된 것으로 보이나 아직 미등록 업체가 10여개 있을 것으로 보아 현재 실제 인쇄소의 수는 90여 업체가 될 것으로 간주된다. 위 등록상황에서 보면 37개 결번에 대한 공부(公簿)상의 기록은 없으나 그간 대장 정리과정에서 오래된 폐업체들을 삭제, 결번처리한 것으로 보아 수많은 인쇄업체, 인쇄인들이 진주의 인쇄문화를 지켜오면서 스쳐간 흔적으로 보이나 기록의 자취는 하나없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가업으로 대를 이어가는 업체가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또한 1980년 이후 신규, 개업, 등록된 업체가 18개 업체로서 현재 인쇄소 전체수의 25%를 차지하고 있으나 거의 소규모 업체이고 그중 경남일보사는 1909년 근대식 인쇄술의 씨를 뿌렸듯이 4색 윤전인쇄기와 전산조판시설을 갖춰 오늘에 또한 진주지방 인쇄문화사에 큰 기록을 남기고 있다.

Ⅲ. 결론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류사상 문자를 사용하여 사실을 영구히 보존하고 또한 널리 알리려고 인쇄술이 발전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역 인쇄인은 지방 인쇄문화사를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이 전무한 상태이다. 그나마 오직 남겨진 자료는 경남일보를 비롯하여 면면히 이어져온 언론의 맥과 일제시대에 몸담아 왔던 원로인쇄인 김만홍, 이수항, 안병일 등의 귀중한 고증으로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지방 인쇄문화사에 있어서 어느 지역이나 지방 보다 앞섰던 문화도시 진주의 인쇄문화가 현재 낙후된 지역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대규모의 시설은 거의 없어도 그 업체수로는 26만 인구의 도시규모에 1백개 업체에 이르고 있는 것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너무 많은 업체수는 인쇄문화 발전에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또한 문화도시의 증표일 것이다. 본고가 진주지역 인쇄문화사를 밝히는 데는 비록 미흡한 자료로 개략적인 것만을 중심으로 기술됐지만 후일 구체적인 것을 정리하는 데 다소 참고자료가 됐으면 한다.

<출처: 인쇄 문화사에 대한 고찰-진주지역을 중심으로 - 장 추 남 /진주 금호인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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